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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회 칼럼] 이 땅의 모든 레나테와 홍옥근

기사승인 2018.01.22  08: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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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5일 평양 중구역 인근 천리마 거리에 있는 창광산여관에서 레나테 홍 할머니(오른쪽)가 생이별 47년 만에 꿈에 그리던 남편 홍옥근씨와 재회해 부둥켜안고 있다.  

―한반도기 동시입장 합의, 민족 동질성 보인 희소식. 하지만 이산가족상봉 불발, 대기 중인 6만 명 또 실망. 인도주의 실천은 국가책무―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일이 목전에 다가오면서 그동안 살아나지 않던 올림픽 열기가 며칠 사이에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인의 겨울스포츠 축제인 이번 동계올림픽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 이어 30년 만에 다시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적인 스포츠 대축전인 만큼 그 역사적인 의미는 아무리 강조한다해도 지나침이 없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불참이 예상되던 북한 팀의 참가를 위한 남북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돼 개·폐회식 공동입·퇴장을 합의하고 여자하키 단일팀 출전, 공동응원, 예술단공연, 태권도 시범 등에 대해 일사천리로 회의가 진행되어 역시 ‘같은 민족’이라는 상징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남북선수단은 푸른 한반도기를 같이 들고, 함께 입장함으로써 감동적인 명장면을 전 세계인들에게 보여 줄 것입니다. 미리부터 설레는 가슴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열린 남북회담에서 우리 측이 제안한 이산가족 상봉은 북한 측의 조건부 거부로 합의를 보지 못해 ‘옥에 티’가 된 것이 못내 아쉬운 대목입니다.

북한 측은 2016년 집단 탈출로 한국에 들어 온 중국 닝보(寧波)의 북한식당 종업원 13명을 송환하기 전에는 이산가족 상봉은 꺼내지도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북측은 남측이 강제로 종업원들을 납치해 끌고 갔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명이 필요 없이 북한은 우리와 다른 공산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폐쇄된 독재체제입니다. 그곳은 남쪽과 같은 자유로운 사회가 아닙니다. 당연히 국민 개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산가족 상봉이 문제가 되었다기에 빛바랜 파일들을 들추어 보았습니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가슴을 적시는 사연들이 줄줄이 기록돼 있었습니다. 지구상에서 우리 민족만이 겪고 있는 비극의 종합 판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독일여성 레나테, 그리고 북한 남자 홍옥근의 사연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들 남녀의 47년에 걸친 애달픈 사랑이야기는 만인의 가슴을 적시고도 남습니다. 언론 보도로 국내에 일부 알려지긴 했었지만 그 사연은 자유로운 나라였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기막힌 이야기였습니다.

레나테 클라이넬레(Renate Kleinele·1937.7.~ ). 그녀가 홍옥근(1934~2012)을 만난 건 열 여덟 살 때인 1955년 이었습니다. 지금은 독일 땅으로 바뀌었지만 당시 공산국가이던 동독 예나시의 프리드리히 실러대학생이었던 그녀는 강의실에서 북한 유학생 홍옥근을 처음 만납니다. 그들은 곧 사랑을 꽃 피웠고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1960년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해 장남 페터 현철을 출산합니다. 꿈같은 기간이었지만 그들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홍옥근은 결혼 다음 해인 1961년 북한대사관으로부터 귀국명령을 받습니다. 청천벽력이었습니다. 그때 레나테는 둘째를 임신하고 있었고 최소 2주일이나 걸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야하는데다 북한의 열악한 출산환경을 염려해 남편을 따라갈 수는 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평생 가장 슬픈 순간이었습니다. 남편이 기차에 오르는 순간, 10개월 된 페터가 ”아빠“라고 비슷한 발음으로 그를 불렀어요. 눈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어요. 잊혀 지지 않아요.” 레나테는 후에 쓴 글에서 남편이 예나역을 떠나던 당시의 심경을 그렇게 적었습니다.

홍옥근이 북한으로 돌아 간 뒤 레나테는 차남 우베를 출산했고 1963년까지는 그런대로 부부의 그리운 사연이 편지에 담겨져 오고갔습니다. 하지만 이내 ‘수취인불명’이라는 도장이 찍혀 편지가 반송돼 오기 시작했고 소식이 끊긴 채 애타는 세월은 흘러만 갔습니다.

레나테는 고등학교 화학선생으로 재직하면서 남편이 다시 돌아올 것을 기다리며 40년이 넘도록 이사도 가지 않고  주변의 인종편견 속에 홀로 아비 없는 두 아이를 길렀습니다. 그녀가 재혼을 하지 않은 것은 “두 아들에게 또 다른 아버지를 갖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45년. 2006년 한국의 ‘오마이뉴스’와 ‘중앙일보,’ 독일의 ‘쉬드도이체 짜이퉁’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짜이퉁’등 독일 신문에 레나테의 사연이 소개됨으로써 두 사람의 안타까운 사랑이 세상에 알려집니다.

레나테는 2007년 독일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김 전대통령은 “부인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 질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또 독일에 온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상봉을 위해 힘쓰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레나테는 또 한국에 와 청와대를 방문, 노무현 대통령에게 “남편을 만나게 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고 곧 예정된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전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또한 한완상 대한적십자 총재도 만나 상봉을 도와달라고 호소합니다.

그것이 주효했기 때문일까. 2007년 7월 드디어 꿈에 그리던 북한의 남편 홍옥근으로 부터 편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2008년 6월 조선적십자회가 레나테와 두 아들 페터 현철, 우베를 평양으로 초청합니다. 평생의 꿈이 실현되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2008년 7월 25일 레나테와 장남 페터 현철, 차남 우베는 긴 비행 끝에 평양공항에 도착합니다. 그곳에는 적십자 직원들과 함께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레나테는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남편 홍옥근과 꿈을 꾸듯, 극적으로 재회합니다. 동독에서 헤어진 지 47년, 나이 71세의 할머니 레나테와 백발이 된 74세의 노인 홍옥근 부부는 그렇게 다시 만났습니다.

동독에서 귀국한 뒤 홍옥근은 화학 관계 기술책임자가 되었고 북한 여성과 재혼 해 가정을 이루고 남매의 아버지가 되어 함흥에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레나테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을 느꼈지만 어쩔 수도 없었습니다. 북한을 다녀온 뒤 기자회견장에서 “이해는 하지만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7박 8일의 꿈같은 일정을 보내고 홍옥근과 헤어진 레나테는 두 아들과 함께 독일로 돌아갑니다. 공항에서 눈물을 감추려고 얼굴을 돌리던 남편을 향해 그녀가 말합니다. “우리의 만남과 아름다운 추억들을 머릿속 깊숙한 곳에 새겨 주세요. 세상이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그 기억만큼은 어느 누구도 앗아갈 수 없을 거예요”라고.

그리고 4년 뒤인 2012년 9월 25일 레나테는 북한 당국의 허가를 얻어 남편과 재상봉하기 위해 다시 평양을 방문합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건 남편 홍옥근이 아니라 20여일 전 그가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홍옥근은 아내 레나테와 아들을 다시 만날 날짜가 다가오자 기쁨에 겨워 흥분했고 그것이 원인이 돼 앞마당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 숨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레나테는 도착 다음 날 아들 페터 현철, 홍옥근이 북한에서 재혼 해 낳은 딸 광희(44)와 함께 함흥 근교에 있는 묘소를 찾아 성묘하고 지하의 남편을 향해 마음속으로 속삭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온다고 하지 말았을 것을…” 레나타와 홍옥근의 러브스토리는 그렇게 막을 내립니다.

한 남자를 그리면서 47년 동안 정절을 지키며 혹독한 세월을 견뎌 온 한 여인의 순애보(純愛譜)는 만남과 헤어짐이 일상사가 된 오늘 우리 사회에 어떤 메시지로 전해지고 있을까.

정부통계에 따르면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한 이산가족 수는 남북한을 합쳐 1000만명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대한적십자사에 상봉을 신청한 숫자는 13만850명. 그 중 상봉인원은 1985년 9월20일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왕래가 시작 된 이래 2015년 10월 20일 20차에 이르기 까지 총 2만3600명으로 전체 상봉희망자의 18%에 불과합니다. 이미 6만9850명이 사망했고 6만1000명이 현재 대기 중입니다.

사실 레나테의 슬픈 이야기는 이 나라 이산가족 수만 명의 사연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이산가족상봉 문제는 올림픽보다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올림픽도 중요하겠지만 국민의 한을 풀어주는 일 역시 그에 못지않습니다. 아니, 더 더욱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김영회(언론인) yhk93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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