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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장길 칼럼] 친구를 자연으로 보내며

기사승인 2018.04.23  07:5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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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한 뒤에 퇴직한 노년들의 질환은 한 개인에 국한된 것이라기보다 한국사회의 아픈 한 단면이다. 한 세대를 풍미했던 주인공들이 이제 밀려나 겪는 비극이다. /여성경제신문 자료사진

우리가 친구의 집으로 들어서자 그가 현관에서 엷은 미소로 힘없이 맞았다. 평소 같으면 활짝 웃으며 큰 소리로 반겼을 텐데 그럴 기력도 없어 보였다. 깡마른 데다가 안색이 몹시 초췌했다. 몇 달 전보다 얼굴에는 골격이 더 두드러졌고, 살집은 거의 다  빠져나가 주름이 주글주글 더 깊어졌으며, 악수하는 손도 뼈마디만 잡힌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딸이 6개월 전에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고 아버지 몰래 살짝 귀띔했다. 그런 사실을 몰랐던지, 아니면 감췄던지 그는 일절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가 며칠 전 정기 모임에 나오지 못해 걱정하던 가까운 친구 몇이 병문안 차 들른 참이었다.

우리들이 거실 소파에 앉아 그의 딸이 준비한 다과를 받을 때까지도 그는 바로 합석하지 못하고 화장실로 들어가 기침소리를 내며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겨우 거실로 비실거리며 걸어나온 그는 근근히 앉아서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분위기를 띄워도 거푸집 같은 미소로 반응할 뿐 목소리가 너무 쉬어 대화조차 나눌 수 없었다. 그는 힘겹게 떡 한 조각을 떼어 먹으며 우리가 더 머물렀으면 하는 눈치를 보였지만, 환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모두 서둘러 일어섰다.

그날부터 고작 나흘 만에 그는 세상을 훌쩍 떠나고 말았다. 딸이 전화로 부친의 갑작스러운 작고를 알리면서 오열했다. 딸은 며칠 전 우리의 병문안을 많이 흡족해 했으므로  ‘아마도  하늘길도 편안하게 가셨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흐느꼈다.

그는 명문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와 한국의 대표적인 대기업에 들어가서 활발히 근무했다. 그 회사에서 광고회사를 창업할 때 선발돼 국내 최고의 수준으로 키우는데 기여하고, 대표이사에까지 오르는 등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일구어냈다. 순박하면서도 친화력이 높아 오지랖도 넓었다. 친구와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술과 담배를 달고 다녔다. 그의 인상과 일생은 술자리와 함께 떠오를 지경이어서 그가 생애를 마감한 뒤 빈소의 조문객들도 온통 그와 나눈 술상에 얽힌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가 천착한 주연(酒宴)은 그 만의 무대는 아니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와 세대의 일반적인 사회 풍조였다. 퇴근길에 직장 동료들과 어울려 한 잔 걸치거나, 또는 거래처나 친구를 만나면 으레 음식점과 술집에서 술과 담배 속에 묻히곤 했다. 술기운이 거나해야 속 깊은 대화가 가능하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저녁 때의 회동은 대개 밤 늦게까지 이어지곤 했으며, 1차에 그치지 않고 2차, 3차까지 자리를 옮겨가며 지겹게 술을 마셨댔다. 주말에도 개인의 생활은 제한적이기가 일쑤였다. 그렇게 어울리지 않으면 고립되기 쉬웠으니 특별한 경우 외에는 자연히  어울리게 되고, 또 어울리고 싶어했다.

생계를 책임졌던 남자들의 사회생활이 주로 밖에서 맴돌다 보니 가정생활은 상대적으로 소흘해지기 마련이었다. 주부들은 가사에 온종일 매달리다가 밤 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졸면서 기다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남자 우위로 편향된 사회분위기가 아니었다면 가정의 평화는 더 험악했을 지 모른다. 남자들의 일과 그와 직·간접으로 연결된 사회생활은 가정생활과 미분화돼 있었으며, 요즘의 기준으로는 가정을 너무 깊이 침범하고 있었다.

풍류가 넘치는 친구의 사교 스타일은 퇴직 후에도 줄곧 이어졌다. 각종 모임의 부지런한 참석은 물론, 가깝게 지내던 친지들을 자주 불러내거나 불려나가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언설을 쏟아내곤 했다. 특히 수년 전 상처(喪妻)를 한 뒤에는 그 외로움을 음주에 매달려 달래는 듯 싶었다. 틈틈이 서점으로 달려가 폭넓은 독서로 역사를 섭렵하고는 그 지식을 안주로 삼아 좌중을 압도하려고 애쓰는 모습도 그가 남긴 최근의 편린들이다.

그의 말년은 그에게 일종의 비극이었다. 우선 그의 화려한 이력에 상응하는 품위 유지비가 확보되지 않아서 종종 난감한 모습을 보였다. 자손들이 진행한 암검사도 가계부담을 우려해 거부한 듯하다. 평생 월급쟁로 살았으니 사교하랴 자식들 뒤치닥거리하랴 재산을 모을 여분이 어디 있었겠는가. 특별한 재능이 있는 이들 말고는 모두의 현실일 것이다.

무엇보다 주변을 안타깝게 한 것은 그의 정신적인 피폐였다. 화려했던 직장생활을 그만둔 뒤에 찾아온 상실감과 소외감, 좌절감은 극복하기가 겨웠을 것이다. 더구나 상처를 한 뒤에는 눈에 띄게 움츠러들고 예민해졌다. 의식과 생각은 사상누각처럼 높이 솟은 종교와 이론, 고급사회의 화려한 에피소드 등의 세계에서 떠돌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에 따르지 못해 갈등이 컸으리라 여겨진다. 내면의 갈등은 날카로운 심성을 빚어내기 마련이다.

그는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종종 불협화음을 보였다. 도덕과 예절을 하찮은 일로 무시해버리고 상식밖의 행동을 벌여서 눈살을  찌푸리게도 했다.  그의 조상이 조선조 성리학의 거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처구니없는 일탈이고 안타까운 무너져내림이었다. 한국사회가 전통문화에서 서구문화로 급히 변신했고, 그러한 변동을 힘겹게 견뎌야 했더라로  그로서는 더 소중하게 보중해야 할 가치에 오히려 역행했던 것이다. 주위의 충고도 그에겐 한낱 언짢은 잔소리일 뿐이었다.

친구의 질환은 한 개인에 국한된 것이라기보다 한국사회의 아픈 한 단면이다. 한 세대를 풍미했다가 밀린, 그가 함께한 세대의 비극이다. 사활이 불안한 전란의 유년기를  거쳐 정치-사회적 혼란기에 고등교육을 받은 뒤 곧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다. 압축성장을 이끈 치열한 경쟁의 청·장년기에는 앞만 보고 달릴 뿐이었지 노후를 걱정할 여유도, 준비도 없었다. 삶을 관통하는 사색과 철학의 빈곤은 너나 할 것 없이 대중들에게 일반적인 추세였다. 그 와중에도 주변에는 이재에 밝은 부류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회사와 일에만 몰두하며 사적인 미래의 설계는 등한시했다. 계속되리라고 믿었던 역할과 관계는 정년퇴직과 함께 와해되고 회한만이 몰려왔다. 깊던, 얇던 하나의 현상으로서 사회적인 병약함으로 쌓이게 된 것이다. 

사회가 그 모든 현상을 책임질 수는 없다. 따듯한 시각으로 사회정책적인 배려 정도가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개개인이 상황에 맞게 섭생하는 적응력을 키워 살길을 찾아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환경변화를 수용하는 세계관일 것이다. 시대변화를 읽는 겸허하고 유연한 사고가 답을 준다. 그러한 적응력과 자세는 건전한 생활철학, 나아가서는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해탈이 단단히 자리잡은 내공에서 나올 수 있다. 친구는 그런 점에서 많은 회한을 남기고 자연에로의 귀의(歸依)의 길을 밟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여, 이승의 고뇌는 사바에 남기고 무궁한 자연 속에서 평안히 영민하시라!  

송장길(언론인·수필가) womaneconomy@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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