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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시베리아에서의 첫 사랑의 추억 (2)

기사승인 2018.08.04  14: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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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노보쿠즈네츠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의 마리야 식구가 살던 방. 마리야를 모델로 한 소설 속 여인들의 디오라마 인형이 서있다.

도스토옙스키 쿠즈네츠크 세 번 방문

도스토옙스키는 결혼을 하기 위해 간 것을 포함해 모두 세차례 쿠즈네츠크에 갔다. 즈미예브까지 갔다가 마리야를 못 만나고 온 것은 물론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처음 간 것은 1856년 7월이다. 쿠즈네츠크로 가는 길목에 있는 바르나울까지 출장을 얻어 갔다가 몰래 쿠즈네츠크까지 가서 마리야를 만나고 이틀동안 지내다 왔다. 그는 이 때 마리야가 자신에게 많이 기울어졌다고 브랑겔에게 쓴 편지에서 말했다. 남편 이사예프가 죽은 후 마리야에게는 중매가 여기저기서 들어왔고, 그녀는 또 베르구노프라는 20대 젊은 교사와도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스토옙스키에게 보낸 편지에 비쳐 도스토옙스키를 아연 긴장시켰었다.

도스토옙스키의 두 번째 쿠즈네츠크 방문은 장교대우 준위로 승진한 직후인 1856년 11월이다. 이때는 장교대우가 되었으므로 공식으로 허가를 받고 쿠즈네츠크에 다녀갔다. 쿠즈네츠크에서 5일간 지냈는데 마리야 집에서 지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 때 마리야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했다. 세 번째로는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1857년 2월에 온 것이다. 이 때 2주정도 머물렀다.

박물관의 에밀리야 쉐스타코바 관장은, “마리야가 단순히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스토옙스키와 결혼한 것은 아니며 도스토옙스에키의 지성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있었다”고 말했다. 

세들어 살던 통나무집을 박물관으로

노보쿠즈네츠크 박물관 본채는 마리야 가족이 세들어 살던 단층 통나무집 전체를 개조해 만든 것인데 집 자체가 크지 않다. 집의 내부는 네 부분으로 나뉘어진 십(十)자 구조인데, 이 중 안쪽 구석 방에서 마리야 가족 세 식구가 살았다. 남편 이사예프가 죽은 후에는 마리야가 아들 파벨과 둘이 살았고.

이 박물관으로 들어서면 첫 번째 전시실에 처음 보이는 것이 오른쪽 벽에 있는 마리야의 전신 그림이다. 1862년에 찍은 마리야의 전신 옆면 사진을 토대로 바샤리나라는 화가가 1996년에 그린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마리야는 금발의 미인이다. 그런데 사진에서 보이는 보이는 옆 얼굴은 바짝 마른 모습이어서 미인의 인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해설사 까제리나 양에게 마리야는 미인으로 알려져있는데 그림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까제리나 양은, 화가가 마리야가 폐병으로 죽기 2년전 에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인데 마리야가 병이 깊은 상태여서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벽면에 그림의 원본이 된 마리야의 작은 사진이 붙어있었는데, 오래된 것이어서 그 자체가 선명하지 않았다. 그래도 도스토옙스키의 첫 사랑이고 첫 결혼의 대상인데 그림은 지나치게 병색을 강조한 듯한 아쉬움이 있었다.

4개의 전시실과 작은 복도

응접실이었을 첫 번째 전시실에는 초입에 있는 마리야의 전신 그림과 함께 도스토엡스키의 대형 얼굴 그림, 도스토옙스키가 브랑겔 남작에게 쓴 편지의 사본, 도스토옙스키의 고난을 상징하는 사형장에서 입었던 흰색 수의를 다소 추상적으로 나타낸 모형물 등이 있었다. 또 둥근 탁자 앞에 앉아 도스토옙스키의 편지를 읽고 있는 모습의 마리야의 디오라마(박물관의 입체 모형)가 창문 옆에 있다.

두 번째 방은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에서 쓴 작품인 『아저씨의 꿈』에 나오는 여주인공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모스깔료바의 살롱을 소설에 묘사된 것처럼 소파, 거울, 시계, 사모바르(러시아의 전통적인 끓는 물 주전자) 등으로 꾸며놓았다.

작은 도시 모르다소프시의 오리랖 넓고 단수 높은 소설 속의 여인 모스깔료바는 아름다운 딸 지나를 죽을 날이 멀지 돈 많은 늙은 공작에게 시집보내 부유한 귀족 미망인을 만들려고 계략을 꾸민다. 이 계략은 결국 실패를 하고 말지만 여인의 악착같은 근성은 마침내 딸을 어느 도시의 시장 부인으로 만들고야 만다는 게 소설의 줄거리다.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에서 이전에 어떤 문학인도 겪지 못한 엄청난 고난을 겪었지만 시베리아에서 군인으로 살던 기간의 문학적 축적은 별로 크지 않다. 시베리아에서의 마지막해인 1859년 『아저씨의 꿈』과 『스체판치꼬보 마을』 등 겨우 두 편을 발표했을 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저작에 대한 출판금지가 풀린 것은 1857년이었다. 그해에 세습귀족의 자격도 돌려받았다. 자신의 유형생활을 어떤 사람의 수기형식으로 쓴 『죽음의 집의 기록』은 시베리아에서 상당 부분을 써놓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서 완성했다.

도스토옙스키와 마리야가 결혼식을 올린 오디기트레옙스크 성당의 그림. 1919년 내전 때 방화로 소실되었다.

소설 속 술주정꾼 마르멜라도프의 부조도

『아저씨의 꿈』을 토대로 미니 살롱으로 꾸민 둘째방과 마리야 가족이 살던 셋째방 사이에는 작은 복도가 있다. 그 한쪽 면에는 두 개의 커다란 정교회 성당이 들어 있는 당시 19세기 중엽의 쿠즈네츠크 시의 그림이 걸려있는데 두 성당 중 한 곳이 도스토옙스키가 마리야와 결혼식을 올린 아름다운 오디기트레옙스크 성당이다. 이 성당은 1764년에 건립된 것인데 1919년 러시아 내전 때 한 무신론자의 방화로 소실된 후 복원되지 못했다.

다른 두 벽면에는 마리야가 쿠즈네츠크에서 살 때 결혼까지 생각했던 도스토옙스키의 경쟁자였던 젊은 교사 베르구노프와 『죄와 벌』의 술주정꾼 마르멜라도프의 부조가 붙어있었다.

『죄와 벌』의 마르멜라도프의 부조가 붙어 있는 이유는 소설에 나오는 그의 부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모델이 이사예바라고 분석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카테리나는 마리야처럼 폐병환자다. 죄와 벌 속에서 마르멜라도프는 술집에서 만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기의 아내 카테리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짐승 같은 놈이지만, 내 아내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영관(領官)의 딸로 태어난 교양있는 여자입니다. 나는 하찮은 쓰레기라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집사람은 숭고한 정신과 고상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 교육받은 여자입니다. (···) 그 여잔 어려서부터 깨끗하게 자랐기때문에 밤낮 빨래를 하거나 걸레질을 하거나 애들 뒤치다꺼리를 해주거든요. 그대로 버려두는 성미가 아닌걸요! 게다가 가슴을 앓고 있어 가끔 피를 토하곤 합니다. (···) 우리 집사람은 유서 깊은 귀족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졸업식 때는 현지사와 내빈들 앞에서 무용으로 금메달과 상장까지 받았답니다.(···) 그렇지만 여편네는 성미가 급하고 오만하여 남에게 굽히기 싫어하는 여자입니다. 비록 자기가 직접 마루를 닦고 검은 빵을 씹을지라도 남이 업신여기는 건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죄와 벌』, 채수동 옮김, 동서문화사, 2015)

마리야 식구가 살았던 세 번째 방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는 화장대 양쪽으로 두 여인의 디오라마 인형이 서있다. 한 사람은 『죄와 벌』의 술주정꾼 마르멜라도프의 아내 카테리나이고 다른 하나는 『백치』의 여주인공 나스타시야라고 했다. 마리야가 두 인물의 모델이라는 의미였다. 『백치』의 나스타시야는 대체로 강한 성격을 가졌던 도스토옙스키의 젊은 애인 수슬로바가 모델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설명을 했다. 마리야의 성격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마르멜라도프가 설명하는 아내 카테리나의 모델이 마리야라면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소설 속 주인공의 성격이 어느 한 사람의 성격만을 표현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지역신문 <시베리아의 생활> 1904년 10월 10일자에 과거 도스토옙스키가 이곳에 와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네 번째 방은 결혼식을 한 성당의 내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혼식을 집전한 튜멘체프 사제의 사진도 있었다. 한쪽 벽에는 도스토옙스키가 과거 이곳에 와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1904년 10월 10일자 <시베리아 생활>지의 기사도 전시되어 있었다. 이 기사 속에는 1858년에 찍은 장교 군복을 입은 도스토옙스키의 사진과 마리야 가족이 사던 집(현재의 노보쿠즈네츠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과 결혼식을 올린 성당의 사진이 들어있다.

마리야가 살던 집을 개조해 만든 박물관 외에 박물관 연구동이 인근에 있었다. 시베리아 스타일의 2층 목조건물이었는데 규모가 작지 않았다. 이 연구동은 박물관 행정실로 불렸다. 이 연구동 앞 마당에 도스토옙스키 흉상이 사각 돌기둥 위에서 연구동 건물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베리아 노보쿠즈네츠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연구동 앞에있는 도스토옙스키 얼굴상 옆에 선 이정식 작가.

이정식 / 언론인 womaneconomy@seoulmedia.co.kr

<저작권자 © 여성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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