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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회 칼럼] 아, 아, 신동문

기사승인 2018.10.22  15:3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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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문 시인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 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그 여자의 입술을 꾀던 내 거짓말은 다 무엇인가
그 눈물을 달래던 내 어릿광대 표정은 다 무엇인가
이 야위고 흰 손가락은 다 무엇인가

제 맛도 모르면서 밤새워 마시는 이 술버릇은
다 무엇인가

그리고 친구여
모두가 모두 창백한 얼굴로 명동에 모이는 친구여
당신들을 만나는 쓸쓸한 이 습성은 다 무엇인가

절반을 더 살고도 절반을 다 못 깨친
이 답답한 목숨의 미련
미련을 되씹는 이 어리석음은 다 무엇인가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한 했던 것이 언제인데

이 시를 처음 본 것은 1964년 2월, 그러니까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을씨년스러운 늦은 오후였습니다. 3년 동안의 긴 군대생활 끝에 막 제대를 하고 일자리를 찾아 서울 거리를 방황하던 시절, 한국은행 오른 쪽 골목을 따라 북창동으로 넘어가는 언덕바지에 있던 미국문화원에서였습니다.

그때 그곳에서는 때마침 시화전에이 열리고 있었는데 말이 문화원이고 시화전이지, 별다른 꾸밈도 없이 빈 창고나 다름없는 휑한 공간에 시인들이 펜으로 먹물을 찍어 직접 시를 쓰고 더러 삽화도 그려 넣은 액자를 벽에 걸어 놓은 쓸쓸하기까지 한 전시회였습니다. 하지만 시인들의 면면은 모두가 당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시 가운데 유독 눈을 사로잡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지개를 등에 진 허름한 중년의 남자가 커다란 막걸리 잔을 들고 식탁이 된 드럼통 앞에 서 있고 ‘내 노동으로’라는 제목아래 가로로 줄줄이 시가 쓰여 있는 것 이 아닌가.

신동문(辛東門).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그것은 그대로 놀라움이었습니다.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었습니다. “절반을 더 살고도 절반을 다 못 깨친 이 답답한 목숨의 미련.” 당시 신동문은 30대 중반이었으니 인생을 모두 말하기에는 이른 나이였지만 그는 60을 산 사람처럼 처절한 자기 성찰로 마치 과거와 미래를 한 점 감춤 없이 내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얼어붙은 사람처럼 얼마를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얼마간의 세월과 살아가야 할 미래를 예언해 주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기 때문입니다. 

1950년대 서울 명동은 폐허가 됐습니다. 3개월 동안 북한 인민군의 점령으로 날마다 미군 폭격기가 포탄을 들어부었고 건물들은 거의 파괴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제일의 번화가인 명동은 부서진 시멘트 덩어리로 뒤덮였고 절망에 빠진 시민들은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악전고투를 벌였습니다.

그때 오아시스를 찾는 사막의 대상(隊商)처럼 명동으로 몰려 든 이들이 바로 문화 예술인이었습니다. 폐허 속에서 나마 명동에는 유명한 돌체다방이 있었고 동방살롱도 있었고 탤런트 최불암씨 어머니 이명숙씨가 운영하던 주점 은성도 있었습니다. 소설가 김동리·황순원·이봉구, 시인 조병화·김수영, 연극인 김동원·백성희, 화가 천경자·이중섭, 국악배우 임춘앵, 번역가 전혜린, 테너 임만섭 등 모든 이들이 그곳에 있었고 그 중에 신동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신동문은 1927년 7월 20일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산덕리에서 태어납니다. 지금은 호수가 되어 물이 가득한 대청댐  물 아래 언덕입니다.

신동문은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소학교와 중학교 시절 몇 차례씩 휴학을 되풀이하고 서울대 문리과 대학에 입학하지만  다시 휴학을 하고 신흥대(현 경희대)로 옮겼으나 6개월 만에 또 휴학을 합니다. 그는 수영을 잘해 1948년 런던올림픽 국가대표 수영선수로 선발이 되기도 하지만 늑막염으로 출전을 포기합니다.

1950년 6·25전쟁 때 공군에 입대했고 1953년 한국일보, 1955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해 이름을 알렸고 1956년 조선일보에 ‘풍선기’가 당선돼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합니다. 그는 1960년 ‘새벽’지 편집장, 경향신문 특집부장, 신구문화사 주간을 거쳐 ‘창작과 비평’사의 초대 대표에 취임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식량 사정을 감안해 “북한에서 쌀을 들여  오자”는 글을 신문에 실어 중앙정보부에 연행된데 이어 ‘창작과 비평’에 미국을 비판하는 리영희 선생의 베트남 전쟁 기사를 실어 다시 또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고초를 당합니다. 신동문은 이때 절필을 결심하고 단양으로의 귀촌을 단행합니다.

신동문은 그곳에서는 농막을 짓고 염소를 키우면서 독학으로 습득한 침술로 주민들을 치료해 주는 일을 본업으로 합니다. 소문이 나자 단양뿐이 아니라 인근 제천, 원주 등지에서도 환자들이 찾아 올 정도였고 몇 만 명의 병고를 풀어줍니다. 그 무렵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원주민들의 병을 고쳐주어 세계의 화제가 되었듯 그에게도 ‘신 바이처’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습니다.

원래 그의 본명은 신건호(辛健浩)입니다. 젊은 시절 폐결핵으로 도립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당시 매일 아침이면 숨을 거둔 시신들이 동쪽 문으로 나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필명을 아주 ‘동문’이라 정해 영원히 ‘신동문’이 됐습니다. 그는 많은 시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작품 활동을 한 기간도 길지 않습니다. 훌륭한 시인이었으면서도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 중 ‘풍선기와 제3포복’을 비롯해 ‘아, 신화같은 다비데군’ ‘내 노동으로’ 등이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하면 평론가들은 신동문의 시는 “비판적 지성을 바탕으로 자기 시대의 삶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풍자적으로 표현하는데 뛰어났다”면서 “특히 그의 초기 시는 전쟁의 파괴적인 요소와 전후 사회의 황폐상을 잘 나타 낸 것으로서 1950~60년대 시단을 꽃피웠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알맞은 체구에 단아한 얼굴, 깊은 내면의 세계를 갖고 있던 신동문 시인. 그는 1993년 담도암이 악화돼 서울의 한 병원에서 향년 63세로 눈을 감았습니다. 

깊어가는 가을, 신동문 시인을 추모하는 여섯 번 째 ‘신동문 문학제’가 엊그제 고향인 청주의 한 공연장에서 300여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이날 행사는 신동문 시인의 후학으로 그의 삶과 그의 문학세계를 조명해 오고 있는 원로 문학인 박영수 딩아돌하문예원 이사장과 원장 임승빈교수에 의해 마련되었습니다.

시인은 가도 시는 영원히 남습니다. 그가 입술을 꾀던 그녀들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명동에서 밤새워 술을 마시던 그 많던 주붕(酒朋)들은 또 어디에 있는가. 오호라.

김영회(언론인) yhk93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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